[에필로그] 오가닉 마케팅을 넘어: 실험실의 네트워크

Beyond Organic Marketing

“창조적 이해를 위해서는 (시공간과 문화 차원에서) 자신의 이해 대상 밖으로 나가보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미하엘 바흐친-[1]

아침 일찍 부산역에 도착했다. 제조업에 기반을 둔 회사는 비즈니스를 네트워크로 진화시키기 위한 전환점에 있었다. 마케팅 플랫폼을 설계하는 워크숍 세션에 사업기획, 경영전략, 마케팅, 개발팀의 핵심 인원들이 참여했다.

본래는 서비스 기획자가 기획하고 개발은 외주를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사람들이 모여 며칠간 네트워크를 정의하는데 열을 올렸다. 비즈니스를 100장의 A4 용지에 글로 적는 대신 도화지 한 장에 그림으로 그렸다. 노드와 링크로 이뤄진 네트워크였다.

이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고객 경험 설계가 구체화되자 모두 알아차렸다. 이미 전략, 기획, 개발, 마케팅의 경계는 사라지고 없었다. 마케팅은 더 이상 어떻게 팔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서 있었다. 매우 어색하고, 불편하며, 혼란스러운 과정이 시작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혁신의 시작점에, 문득, 모두가 와있었다. 이 작업은 단순히 마케팅 플랫폼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결국 회사의 비즈니스 자체가 재정의되는 과정이었다.

내가 만약 마케팅 전공자였다면 감히 이런 책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마케팅의 틀에서 보면 너무 크게 벗어나서 차라리 마케팅 책이 아니다. 반면 마케팅이라고 제한하기에는 훨씬 넓은 영역들이 연결되어 있다. 마케터는 마케팅 책이 아니라고 할 것이고 마케팅 밖의 사람들은 제목만 보고 책을 외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오가닉 미디어»를 매개로 회사들을 만나며 가장 많이 접한 고민이 마케팅이었지만 처음에는 큰 의미를 두지 못했다. 미디어의 진화가 어떻게 마케팅도 바꾸게 되는지 고민하고 실험하고 조언해왔지만 거기까지였다. 나 자신도 마케팅이라는 학문에 고정 관념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회학과 미디어의 경계에 스스로를 가둬 두고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은 본래 ‘오가닉 미디어의 단면들(facets)’이었다. 이번 책은 오가닉 미디어 현상이 표출되는 각 분야로 렌즈를 옮겨 광고, 경험, 컨텍스트, 제품 등 여러 단면을 짚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독자들, 파트너들의 요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3년에 걸쳐 생산된 글들을 한 줄로 세워보니 결과는 참담했다. 말이 단면들이지 하나로 묶어지지가 않았다. 글들은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전체를 관통하는 결론은 네트워크지만 그것만으로는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이미 사회학이나 미디어의 영역도  훨씬 넘어서서 의미가 없었다.

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고민하며 읽고 또 읽고 고치고 또 고쳤다. 줄을 세웠다 흐트러뜨렸다를 반복했다. 발견은 이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 책은 사실 새로운 영역의 출현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존 영역들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 이미 답이었다.

이제 사고는 자유로워졌다. 사회와 시장, 개인과 고객, 미디어와 네트워크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데, 안과 밖이 없는데 또 어떤 새로운 영역을 만들고 경계를 세우려고 했는가. 그렇게 나의 가장 많은 독자와 질문이 있는 곳으로 길을 돌아왔다. 제품, 고객, 경험, 가치, 광고, 브랜드의 본질적 진화가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타깃이 되어온 대중은 사라졌다. 불특정 다수가 특정한 한 명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마케팅을 할 것인가? 여기서는 선과 후, 안과 밖, 공급과 소비, 겉과 속의 경계도 없다. 개인이 모두 경계 없는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끊어지고 움직인다. 마케팅의 본질이 변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문제다.

네트워크가 하나의 작은 연결에서 시작한다고, 꾸준한 반복을 통해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사람들은 되묻는다. 잘 이해했다, 그럼 대중 마케팅은 어느 시점에서 하면 되느냐고 묻는다. 그래도 어느 순간이 되면  대중을 타깃으로 한 번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대중은 없다.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폭격을 한다는 말인가. 오가닉 마케팅이란 처음에 네트워크를 정성 들여 만들고 나중에 대중을 타깃으로 확장한다는 뜻이 아니다. 먼저 연결된 개인과 나중에 연결된 개인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연결이 다른 연결을 만들어서 생기는 연결의 ‘과정(상태)’이 바로 네트워크다. 그래서 살아있다. 네트워크를 설계한다는 것은 연결의 과정을 설계하는 것이다. 연결이 다시 거대한 연결을 만들지만 이 시점에도 대중은 없다. 불특정 다수를 타깃으로 할 경우 오히려 먼 길을, 많은 비용을 써서 돌아갈 뿐이다.

비즈니스를 네트워크로 전환시키는 여정을 스타트업도 대기업도 시작했다. 이들의 책상은, 회의실은 우리의 실험실이다. 단순히 제품을 네트워크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 번에 이뤄지지 않기에 도전은 더욱 의미가 있다. 조직이 협업하는 방식, 가치를 만드는 과정, 결국 나의 사고하는 방법이 함께 변해야만 가능한 여정이다.

그 변화는 오직 체득에서 일어날 것이다. 네트워크를 직접 내 손으로 설계하고 고객과 함께 시장에서 배워가는 과정에 답이 있다. 나도 그 길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있다.

이 책은 마케팅의 이름으로 내는  미디어 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고객의 경험, 컨텍스트의 연결, 인터페이스의 진화, 네트워크의 원리, 유기적 협업과 신뢰 등은 마케팅의 눈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들이다. 그러나 연결된 세상의 미디어에 대한 근원적 이해가 발견을 위한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모든 관계가 경계없는 네트워크로 남김 없이 재편되는 현상의 한복판에 있다. 틀에서 깨어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그 시작점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1. Mikhail Bakhtin, Speech Genres and Other Late Essays, trans., Vern W. McGee, Austin: Univ. of Texas, 1986, p.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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